서점 들른 날
2024. 2. 5. 23:50오랜만에 차분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한 주의 일정을 정리하고 주말 동안 쌓인 메시지에 답장을 했습니다. 올해 목표 중 하나인 ‘연락 미루지 않기’를 제법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고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이었지만 기분만은 산뜻했습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작업을 하다 잠시 창밖을 보니 조금 전의 비는 어느새 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따 외근하러 나가야 하는데, 하필이면 싶다가도 비보단 낫다며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느지막한 오후, 외근 장소로 향하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갑자기 눈보라가 쳤습니다. 아끼는 코트에 달라붙는 얼음 알갱이들이 미워서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요즘같이 독감이 유행하는 때 몸이 차면 감기 걸릴 수도 있어’라고 합리화를 하며 따뜻한 라떼를 한 잔 마시고 회의에 들어갔습니다.
회의는 순탄했습니다. 그렇지만 회의가 끝난 후의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미처 메꾸지 못한 구멍들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괜히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멋대로 상상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버릇임을 알기에 그런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뒤숭숭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나 들어 보러 서점에 들렀습니다.
에세이, 소설, 인문 코너를 어슬렁거리며 수많은 표지와 책등을 둘러봤습니다. ‘ㅂ’ 서가에는 불안이 있었고 ‘ㅅ’에는 산책과 사랑이, ‘ㅇ’에는 일과 우울이, ‘ㅎ’에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건 나 뿐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책을 사는 건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라며 두 번째 합리화를 하고는 양손에 책 한 권씩 쥐어 나왔습니다. 가방은 묵직해졌지만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Fix You
2022. 9. 23. 02:28
다들 음악은 언제 들으시나요? 저는 주로 일을 하다 졸음이 몰려오는 순간에, 어수선한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듣습니다. 잠을 깨거나 귀를 틀어막으려는 목적이니 듣는다고 하기엔 좀 그러려나요. 예전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나오면 가사와 숨 쉬는 자리, 악기들이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외울 만큼 반복하고 경청했는데 이제는 그런 기억이 희미합니다.
해 뜨면 일하랴 해 지면 집안일하랴. 오밤중엔 밀린 글쓰기와 작업을 하려니 듣는 즐거움을 느낄 새가 없긴 합니다. 게다가 유튜브에 들어가서 손가락이 원하는 영상과 숏츠들을 훑고 나면 눈이랑 귀에 온갖 자극이 빼곡하게 차 버립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노래에만 집중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시대 탓을 하며 푸념하는데 속마음이 나타나서 이야기합니다. 그저 핑계라고요. 더이상 노랫말에 동할 정도로 감각이 생생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드렁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습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 말랑했던 열아홉의 심정을 되찾아보려 합니다.
잠들기 전에 매일 한 곡씩 오로지 소리에 집중해서 감상하는 것. 이게 제 작전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기 어렵겠지만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차가웠던 겨울날 Fix You의 첫 소절에 훌쩍거리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백 일을 열 번 보내면
2022. 9. 9. 16:40
며칠 전 짝꿍과 천 일을 맞이했다. 둘 다 기념일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어서 몇십 일이든 몇백 일이든 덤덤히 보내는 편인데 숫자가 네 자리로 넘어간다 하니 이번만큼은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평소보다 들뜬 마음으로 남은 날을 손꼽아 세었다. 따로 준비하는 건 없었지만 여느 때처럼 단출하게 축하와 고마움을 담은 편지를 전하기로 했다.
천 일을 앞둔 주말이었다. 짝꿍과 쇼핑몰을 구경하던 중 그가 귀여운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는데 사실은 자기가 기념일 선물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선물도 선물인데 그 말을 하는 짝꿍의 표정과 어투가. 무엇이 그리도 설레는지 근사한 생일 파티를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우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예쁜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곤 미안해졌다. 그의 마음에 비해 내 것이 너무나도 얕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짝꿍은 늘 마음을 가득 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속은 우리의 추억을 담고도 나의 행복과 불행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내 면접일에 뱉은 심호흡, 합격 소식을 듣고 활짝 핀 얼굴, 엄마와 아빠가 감기에 걸린 날 안부를 챙기라 일러주던 목소리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이 마음은 그의 깊이를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기만 하다. 천 일 후에는 슬픔까지 고스란히 느끼는 짝꿍이 되어주고 싶다.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일기
2022. 7. 18. 22:57
2년 전, 오랜 친구 민하와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에 매주 한 편씩 글을 쓰고, 서로의 것을 읽고, 코멘트를 남겨주었죠. 자주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글로나마 안부를 전해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놓는 재미도 컸고요. 그런데 처음부터 잔뜩 힘을 준 탓이었을까요. 열 편 남짓 쓰고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한동안 쉬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손이 근질거리던 차에 마침맞은 기회가 나타났습니다. 민하와 가깝게 지내는 이가 소설을 쓰신다는 거 있죠. 모임에 동참할 의향이 있으신지 물으니 흔쾌히(맞겠죠?) 좋다고 하시길래 그 길로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마감 주기를 늘려도 당일에 밤새워 끝내는 건 여전했습니다만, 포기는 하지 말자며 간신히 써냈더니 어느덧 두 번째 열 편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자면 이번엔 글 쓰는 게 전만큼 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아마도 동기를 잃은 까닭일 것입니다. 취향이나 추억을 꺼내서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일이 가장 즐거울 때가 있었지만 이젠 그 일에서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졌으니 말이에요. 일기장에 간직해도 될 말을 굳이 꺼낼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여느 때처럼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 나의 이야기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심한 유머를 알아차리는 사람에겐 잔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고 이 마음은 아무도 몰라줄 거라고 외로워하는 누군가에겐 의도치 않은 위로를 건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바람을 담아 계속해서 적어 냅니다.
사뿐한 밤
2022. 6. 20. 01:31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나의 하루는 서너 시간쯤 남습니다. 뜨다 만 손가방과 꼬박꼬박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있어 그 시간만을 기다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별 의욕 없이 막연한 날도 있지요. 그럴 땐 오늘이 언제 가려나 생각하면서 옆구리에 책을 끼워 둔 채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속을 방황합니다. 작년엔 소파에 앉아 테레비를 보며 아빠와 수다를 떠는 게 하루 일과였지만 따로 살림을 꾸린 지금은 그 틈이 적막해서 무엇으로든 채워보려 합니다.
얼마 전, 특히나 조용한 날이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바라보는 화면은 엎어 놓았고 책도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피로가 쌓였는지 보거나 읽을 만한 건 최대한 멀리하고 싶더라구요.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게 어색해서 침대에 누웠습니다. 조금이라도 꿈쩍거리면 몸에 열이 오를 테니 손끝까지 힘을 쭈욱 빼고서요. 후덥지근한 열대야에도 에어컨은 필요 없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덥지 않다던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창밖의 희미한 차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엔 아쉬워 짧은 청음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오늘의 앨범은 김현철의 1집. 사무실에서 우연히 김현철 씨의 곡을 듣고 그분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여러 번 추천 받은 기억이 나서 골랐습니다.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구석이 있어 뜨뜻한 밤과 잘 어울렸습니다. 담담한 노랫말은 동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잠시 동안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지요. ‹나의 그대는›이 나올 때쯤엔 나지막한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잠들고 말았습니다. 밤은 그렇게 사뿐히 지나갔습니다.
조용한 수다
2022. 5. 21. 17:12
수요일에 마포중앙도서관을 다녀왔다. 요 근래 유튜브 알고리즘 여행을 한참 했더니 그새 싫증이 나버려 책 좀 읽어볼까 싶었기 때문이다. 집에 묵혀 둔 책들은 그동안 표지를 많이 보아서인지 결말까지 읽은 듯 호기심이 사그라들었고 철학이나 디자인 서적 등 한껏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을 것들 뿐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퇴근 후 동네 친구와 나누는 담소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도서관은 널찍하고 쾌적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차분한 공기에 신이 나서 두근거렸다. 자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굴려 지리를 파악하고 000번 서가부터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이곳엔 특이하게 독립출판물만 모아놓은 서가가 있었다. 공립 도서관에 독립출판물이라니. 역시 마포구는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감탄하며 예술 서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칭찬을 1분 만에 취소했다. 홍익대학교만큼은 아니더라도 책장 두 개 정도의 분량은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한 면에 듬성듬성 꽂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 흩어져 있는데 내가 못 본 건 아닌지 사실 아직도 의심하고 있다. 도서 신청을 부지런히 해서 황량한 곳간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글을 쓴 이후 다시 확인해보았더니 역시나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었다. 예술 서가는 여러 개다. 다만 여기저기 흩어져있으니 잘 찾아보아야 한다.)
고민 끝에 네 권의 책을 빌렸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두 권, 사각형의 역사, 민음사의 한국단편문학선. 안부를 나누고 조금 진지한 얘기도 하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도록 나름 밸런스를 고려해서 구성했다. 이번엔 연장 찬스를 쓰지 않고 제때 반납할 수 있을까? 눈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일은 없길 바란다.
미우나 고우나
2022. 5. 6. 03:49
마감일은 다가오고 작업은 해야겠는데 진전이 없었다. 날이 좋아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거나 나른하니 낮잠을 자고 싶은 느슨함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으나 되려 어깨는 힘이 들어가서 뻣뻣하게 말려있었고 분주한 마음으로 온갖 레퍼런스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마우스 휠만 굴릴 뿐이었다. 메모장에 적은 아이디어는 수두룩하면서 손은 자꾸 머뭇머뭇, 화면엔 빈 대지만 덩그러니.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초조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열심히 궁리하는 동안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 번은 생각을 주입해 세상을 조종하려는 악당을, 또 한 번은 우리 가족을 해하려는 삼촌(이라고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피해 전력 질주하는 내용이었다. 정말로 달아나고 싶었는지 잠에서 깼을 때 불쾌하다기보다 조금 후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지나야 할 시간임을 알기에 한편으론 오기가 생겼다.
해답은 오랫동안 켜지 않은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당연하고 간단했다. 내게 부족했던 건 메모장 속 단어들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똑같은 산을 그려도 투박한 산이 있으면 섬세한 산이 있고, 투박함과 섬세함 사이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 만개의 이미지가 있다. 나는 그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가장 알맞은 표현을 산보하듯 가볍게 찾아다니면 된다.
뛰어넘기 어려운 문제를 놓고 갈 땐 정말이지 꼴뵈기 싫다가도 풀고 나면 크나큰 즐거움과 희열을 가져다 주는 게 한없이 좋다. 미우나 고우나 나에겐 이것 뿐이다. 5월에는 사이 좋게 지내보자.
잠옷의 조건
2022. 4. 11. 00:32
여행을 가거나 친구 집에 묵게 되면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방에서 피우던 향을, 또 어떤 이는 좋아하는 수면등을 챙겨 다니며 낯선 곳에 익숙함을 불어넣곤 한다. 나는 다행히도 어디서든 무난하게 자는 편이라 공간을 특별히 가꾸진 않지만 잠옷만은 꼭 갖춰 입는다. 그래야 흐느적거리는 문어의 자세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어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잠옷 안에서만 솟아난다.
첫 번째 관문은 재질이다. 몸에 닿았을 때 이질감이 없고 솜털의 보송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면옷이어야 한다. 고급 소재로 인기가 좋은 비단은 너무나도 유려해 미끌거리는 장어같아서 탈락, 땀이 잘 마르거나 발열을 돕는 특수 소재는 플라스틱을 입는 기분이 나서 탈락이다. 그렇다고 면옷이라 해서 모두 합격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부드러움에 말랑함까지 더해져야 비로소 흡족하다. 그 말랑함은 10년 넘게 입은 티셔츠에서 느낄 수 있는 감촉으로, 목이나 소매 부분이 흐늘흐늘하고 옷감이 어느 정도 탄성을 잃은 상태를 말한다. 글로 써놓으니 내가 쿰쿰한 냄새까지 즐기는 사람 같아서 그러는데 나도 햇볕에 바싹 마른 섬유 유연제 향이 좋다. 묵은 티셔츠는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일 뿐이니 오해 마셔요.
재질 다음으로 중요한 건 두께다. 얇으면 살에 척척 감겨서 자고 일어났을 때 뒤척거린 횟수만큼 옷이 돌아가있고 겨울이나 일교차가 큰 날씨에 몸이 으실으실해서 더 껴입어야 한다. 반대로 두꺼운 잠옷은 배배 꼬이지 않고 한 벌로도 따뜻해서 좋지만 이불의 푸근함에 무뎌진다는 게 아쉽다. 내가 이불인지, 이불이 나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러야 진정한 잠을 잤다고 할 수 있는데 수면 잠옷처럼 두툼한 친구들은 한 꺼풀의 막과 같아서 침구 사이에 내가 끼어있는 느낌이다. 뭐든지 적당한 게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나. 잠옷의 두께 역시 그렇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웬만해선 합격이다.
마지막 조건은 간단하다. 투피스면 된다. 엄마는 원피스가 편하고 통풍도 잘돼서 오직 원피스만을 고집하지만 나는 조신하지 못하고 다리를 자유로이 움직이는 편이라 종종 민망한 상황이 벌어진다. 게다가 원피스를 입고 자면 옷이 점점 말려올라가는데 요게 꽤나 불편하다. 명치까지 훤히 드러나서 배탈이 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수족냉증이 있는 나로선 하체가 시려서 자는 도중에 쥐가 나기도 한다. 두 다리를 각각 넣고 휘적휘적 활보할 수 있는 바지가 딱이다.
깐깐스레 군 만큼 모든 기준을 충족한 잠옷을 찾으면 그렇게 보람차고 든든할 수가 없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물을 잃은 문어 마냥 쩍 마른 채로 꿈쩍거리다가도 옷 하나로 촉촉함을 되찾으니 말이다. 그 어느 잠옷도 피로의 무게를 털어 낼 순 없지만 개운함, 그거 하나 더해주는 걸로 난 흔쾌히 만족한다.
산책할까?
2022. 3. 25. 01:34
일, 공부, 운동, 연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네 가지 단어 중 ‘신우’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를 꼽으라고 하면 모두 ‘연애’라고 답할 것이다. 백 프로 확신한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짝꿍을 2년 넘게 만나고 있는 나조차도 아직 그 단어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지금의 짝꿍이 첫 상대일뿐더러 어렸을 적부터 이성 친구들과 데면데면하게 지내서 미묘한 기류는 겪어본 적 없으니, 더욱이 나에겐 개인 시간이 너무나도 중요해서 누군가를 만날 의향은 딱히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른들이 남자친구는 안 만나냐고 여쭤보시면 진심을 다해 그 시간에 잠을 잘 거라고 대답했다. 나의 하루엔 연애가 끼어들 틈이 도무지 없어서 이번 생은 그냥 넘어가겠군 생각했다.
이런 내가 느닷없이 연애 소식을 전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놀라다 못해 경악했고 아마 신우랑 되게 비슷한 사람일 거라며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 흠, 비슷한 사람이라… 공통점이 많긴 많다. 그러나 교집합의 크기만큼 차이도 꽤나 크다.
짝꿍은 독서보다 영화 감상에 취미가 있다. 잔잔한 다큐는 보다가 잠들지언정 쫀쫀한 액션 영화는 챙겨 보고 그 중에서 난 한 편도 본 적 없는 마블 시리즈를 좋아한다. 음악은 유튜브 뮤직 탑 100을 듣다 귀에 꽂히는 노래는 따로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반복 재생하며 사이사이엔 노래방에서 부르기 좋은 발라드를 섞는다. 스포티파이에서 생소한 음악을, 그것도 발라드만 쏙 빼고 골라 듣는 누구와 참 다르다. 식성도 마찬가지다. 짝꿍은 나의 주식을 풀때기와 구황작물이라 부른다. 식물성 단백질도 엄연히 단백질이건만 동물성 단백질을 꼭 먹어줘야 한단다. 참고로 짝지는 수육 또는 삼겹살을 가장 좋아한다. 서로 이렇게 달라서야. 통성명을 하고 상대방을 알아가는 시점에 이 사람과 친해지기는 어렵겠거니 싶었다. 이 사이를 언제까지 이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날을 보내던 중 그쪽에서 메시지를 보내왔다.
산책할까?
산책이라는 단어는 참 희한했다. 낯선 이를 경계하느라 멀찍이 숨어 꼼짝도 않던 나의 걸음을 떼어주었으니 말이다. 산책은 밥 한번, 커피 한 잔, 영화 한 편과 달랐다. 서로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몸에 일정한 리듬을 익힌 다음, 대화로 자연스레 주의를 이끌었다. 거의 매일 밤 혼자 산책을 나온다는 그 사람의 말에서 언뜻 내가 보여 반가웠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의 산책동무였고 학기를 끝마칠 쯤엔 짝꿍이 되어있었다.
그해 늦가을로 돌아가서 그 사람이, 그 타이밍에 산책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느 사이처럼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시작했다면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을까? 아니, 결국에 가서는 내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다가갔을 것이다. 산책이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요상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저 쑥스러운 마음을 감싼 포장지였을 뿐이다. 이제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산책은 그냥 둘러댄 거고 실은 좋아한 마음이 먼저야.
독립기 2
2022. 3. 11. 04:47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의 네모난 방에 아담한 냉장고 하나가 멀뚱히 놓여 있다. 이곳을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가꾸기까지 무엇이, 얼마나 필요할까? 영수증의 길이로 가늠해보자면 다리에서부터 명치까지 휘감고도 남을 정도일 것이다. 몸 하나에 따라오는 물건이 이렇게나 많다니. 나름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 스스로 생각해왔는데 그건 그저 이상형이었나보다. 나는 자신이 손에 뭘 쥐고 있는지 개코도 모르는 아이였다.
독립 첫 날은 월요일이었다. 컴컴한 새벽에 부스스 일어난 엄마와 포옹을 하고 걱정과 격려를 받으며 출근, 출가했다. 계약할 때까지는 모르겠더니 이때야 비로소 집을 떠난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지만 돌아갈 날이 정해져 있는 것과 정해져 있지 않은 건 아주 다르니까 그 무게감의 차이로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마 엄마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미리 싸놓았던 짐을 챙겨와주었다. 차를 갖고 온 김에 필요한 것들을 지금 사서 나르자며 마트로 향했다. 시간이 넉넉치 않아 손을 휘적휘적 뻗어서 물건을 집었고 각자 찢어져서 필요한 것들을 찾아오는, 굉장히 전략적인 장보기였다. 아빠와 마트를 한두 번 간 것도 아닌데 유독 들뜬 날이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움직인 게 미안해서 내가 좋아하는 초밥집 세트 메뉴에 이것저것 추가해 배달시켰다. 상과 의자가 없던 때라 바닥에 앉아서 먹었지만 왠지 피크닉 온 느낌이라 이 또한 재밌었다. 잘 살라며 덕담을 해준 아빠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와 요랑 이불을 후줄근하게 폈다. 냉장고와 여섯 보따리 뿐인 방을 어떻게 채울런지 막연해하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이후의 시간은 하루의 경계 없이 후루룩 흘러갔다. 낮엔 회사로 출근해서 디자인 노동, 밤엔 다시 집으로 출근해서 청소와 조립 노동. 노동으로 꽉 채운 2주였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것이 다이어트란 생각이 들어서 그리 억울하진 않았다.
첫째 주엔 곰팡이, 묵은 때와의 사투를 벌였다. 항상 자취생들의 집으로 쓰여왔던 곳이라 그런지 살림살이가 그리 꼼꼼하게 관리돼 있진 않았다. 화장실 줄눈과 천장에 곰팡이는 기본이요, 스테인리스 집기에는 녹이 슬어있었다. 거짓말 안 하고 청동기 시대 유물인 줄 알았다. 종류별 세정제와 청소 브러쉬를 사서 이틀에 걸쳐 미친 듯이 닦았다. 청동기 유물은 살리지 못했지만 곰팡이는 얼추 해결했다. 특히 줄눈은 새 것이 되어서 아주 뿌듯했다. 주방의 묵은 때도 참 할 말 많은데, 이전에 계시던 분께서 고기를 자주 구워드셨는지 벽이 끈적거렸고 후드에 기름 방울이 맺혀 있었다. 세제, 과탄산소다, 매직 블럭, 그 무엇도 통하지 않더니 알코올 하나로 휘리릭 해결됐다. 만능 알코올!
둘째 주에는 오늘의 집과 이케아에서 주문해놓았던 가구들이 속속 도착했다. 아빠랑 가구 조립 몇 번 해본 게 큰 도움이 되어서 헤매지 않고 뚱땅뚱땅 할 수 있었다. 다만 시간대가 밤인지라 큰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다보니 혼자 고요히 난리를 피웠다. 그 모습을 누가 보지 않은 게 참 다행이다.
열흘 넘게 밤낮 가리지 않으며 노동한 대가로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짐 보따리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본가를 나서던 날부터 어지러웠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지금은 집다운 집을 만든지도 한 달이 지나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보내며 지낸다. 별일 없이 저녁 뭐 해먹지, 내일은 또 뭐 먹지 생각하는 날들이 무료하다가도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복 받았다 싶은 게 꾸짖음이 호되기는 했나보다. 약효가 떨어지려면 아직 먼 듯 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혼구녕이 필요 없을 만큼 나의 자립 생활이 몸에 익게 되면 살림을 꾸리는 데 손을 보태 준, 내가 잘 살기를 바라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그때까지 멋진 어른이 되어보려 할 테니 모두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좋겠다.
독립기 1
2022. 2. 24. 23:02
그런 때가 있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되풀이되다가 어느 순간 폭풍이 들이닥쳐 일상을 잃어버리는 때가. 나에겐 지난 2개월이 그랬다.
작년 말로 거슬러 올라가 얘기해보자면, 나는 한 해를 쏟아부은 졸업 프로젝트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업을 하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출퇴근 시간을 정해놓고, 일정표도 짜고, 노션에 신우 회사 페이지도 만들어서 직장인 기분을 내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엄마와 아빠는 아침 인사를 건넬 때마다 나를 신우 사장님이라 불러 과몰입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고작 일주일이 흘렀을까. 별 일 없이 사는 게 복인 줄은 알았지만 첫 날 느낀 재미는 온데간데없었고 성실한 일상은 권태롭기만 했다. 그런 날 누군가 꾸짖고 싶었는지 어디 한 번 맛 좀 보라며 머리 위로 낯선 일을 우수수 털어놓고 갔다.
수북히 쌓인 일 더미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취업이다. 1월 중순, 지원서를 냈던 회사 중 한 곳에 합격해 곧장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제일 간절히 바라던 곳에 다니게 되어 형용이 어려울만큼 기뻤지만서도 부담이 가득했다. 일에 의한 것이 아닌 독립에 대한 걱정으로 말이다. 왕복 네 시간이 넘는 통근 시간에 얼마 다니지도 않고 지칠 것 같아서, 왔다갔다 할 체력으로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덜컥 본가에서 나오기로 결정했다. 자취는 학교 다닐 때도 해봤으니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 머무는 것과 새롭게 살림을 꾸리는 게 천지차이라는 건 독립 준비 첫 날 대번 깨달았다.
내가 글 쓰는 법
2021. 2. 17. 08:20
여태껏 많은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달간 지속했다고 작은 노하우라 할 만한 것이 생겼다. 블로그에 처음 글을 쓸 때만 해도 빈 화면이 막연해서 오늘은 또 어떻게 시작하나 싶고 이거 썼다 저거 썼다 하루 종일 의자에 붙어있었는데 요즘엔 나름의 루틴을 따라가며 쓰니 한결 편해졌다. 때때로 글은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받아서 그에 대답할 겸, 내 무의식적인 행동도 되짚어 볼 겸, 나의 글쓰기 습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 틈새 쓰기
최근에 생긴 루틴이지만 나와 잘 맞아서 제일 유용한 방법, 틈새 쓰기.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짬을 내서 글 쓰는 것을 말한다(원래 있는 단어 아님). 작년에는 목요일이 되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글을 완성할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집중이 잘 되고 흐름이 자연스러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물론 몰입할 수는 있었지만 그 시간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 생각이 머리에 꽉 차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잠시 쉬려해도 눈앞에 모니터가 있으니 신경을 끌 수 있어야 말이지. 그러나 틈새 쓰기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창밖을 구경하거나 사람들을 관찰하고서 생각이 정리됐을 때 다시 쓰면 된다. 무지하게 지루한 출퇴근길도 슝 보내고 집에서는 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주위가 소란하다면 이어폰을 끼고 재즈를 들어도 좋다. 카페 온 것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다.
2. 한 문장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른 채 시작하면 글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 있는 얘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쭉 적다가는 도입과 마무리 없이 본문 조각들만 널브러진 상태를 마주하게 되는데 나는 그럴 때 ‘내가 이걸 왜 때문에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며 현타가 온다. 그래서 등대처럼 길을 안내해 줄 문장을 하나 딱 정해둔다. 그 방향대로 가는 게 편하고 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3. 꼬리에 꼬리 물기
본격적으로 글을 풀어낼 때 쓰는 방법이다. 일단 군더더기 없이 최대한 짧고 명확한 문장을 쓴 다음, 그 짧은 문장들을 서로 이으며 전체적인 틀을 잡는다. 예를 들면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 그중에서도 산미가 없는 게 좋다 - 톡 쏘는 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요런 식으로. 처음에는 글이 뚝뚝 끊기는 것 같아도 접속사로 조합하고 수식어 붙이는 건 나중에 하면 되니까 괜찮다. 개인적으로 담백한 글이 좋고 무엇보다 한 문장 안에 많은 내용을 담으면 흐름이 어색한 부분을 찾는 게 어렵더라고요.
흠 일단 내 방법은 여기까지. 나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속 시원한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글은 쓰고 싶지만 시작이 어려운 사람들이 간단히 참고할 만한 게 된다면 뿌듯하겠다. 각자의 성향에 맞는 방법을 찾길 바라며.
뜨개 수련
2021. 1. 15. 20:19
지난 가을부터 뜨개 수련을 하고 있다. 김대리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영업을 당해 코바늘 마스터 세트, 일명 코마셋을 구입한 게 그 시작이었다. 어떻게 하는지 잘은 몰랐지만 고등학생 때 신생아 모자뜨기를 해봤던 터라 나름의 자신감을 안고 코마셋 언박싱 데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애초에 ‘무엇을 만들어야겠다’는 목표 없이 시작한 취미라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 자체를 즐겨서 뜨개질을 할 때마다 신이 났다. 약속이 있어 밖에 나간 날엔 얼른 뜨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바늘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여 올바른 위치에 넣으면 매듭이 생기고, 똑같은 매듭을 계속 짓다 보면 어느 틈에 편물이 완성되는데 고르게 짜인 조각을 만들었을 때 엄청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코마셋을 완주해 요즘은 대바늘 연습을 한창 하는 중이다. 내 눈엔 코바늘보다 대바늘의 매듭 모양이 예뻐서 더욱 재밌게 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 해도 질리지 않는 취미가 왜 수련이냐 하면 일단 하나의 편물을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만약 중간에 규칙을 틀렸다면 그 지점부터 다시 떠야하기 때문이다 ^.^ 복구 방법이 있긴 하지만 실수를 연달아 했다면 살려낼 수 없다. 그저 푸르시오를 하는 수밖에. 뜨개질은 정말 인내심을 기르는 최고의 방법이다.
떴다가 풀었다가.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보드라웠던 고급 실도 마구 갈라지고 이미 몇 번 세탁기에 돌린 것처럼 후줄근해진다. 그걸 보고 있자면 처음의 기대와는 너무 다르니 승질도 나고 확 포기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럼에도 끝장을 보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끈기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나 끈질긴 사람이야! 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별 거 아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도 아무리 수련이 좋다지만 지금 뜨고 있는 그 목도리 다음주에는 끝내고 싶다. 더 이상의 푸르시오 없어야 한다. 제발!
요즘, 생각
2021. 1. 8. 09:24
다들 안녕하신지 :)
완전 휴식 글을 올리고 두 달 만에 돌아왔다. 요 두 달 만큼은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아주 내 멋대로 쉬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깨는 건 기본이요 내내 미루던 넷플릭스 다큐와 고대하던 킹덤도 원 없이 봐서 이제 속이 다 시원하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지는 않았다. 요즘처럼 날이 추워지기 전에 한 번은 엄마 아빠랑, 또 한 번은 민하랑 바다를 보러 갔다.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도 상쾌해서 겨울 바다를 정말 좋아하는데 앞으로도 올해처럼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아무 생각 없이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고 어마어마한 성취감까지 주는, 나의 사랑 뜨개질. 코바늘로 시작해서 대바늘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마스터가 되려면 아직 멀었고 지금은 뜨개 어린이 정도 후후. 어른이 되는 그날까지 열뜨(열심히 뜨개질)할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충분히 쉬고도 아쉬울 만큼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사실 그동안에도 생각을 완전히 비울 순 없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인지라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알게 모르게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해오던 고민이어도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니 무게가 불어난 것 같달까. 예전에는 내가 재미를 느낀다면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해보던 것도 요샌 이거 재고 저거 재느라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거리를 만들어 놓으니 말이다.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따지는 게 많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냥 그렇게 넘기려고 했는데 생각을 거듭하고 보니 역시나, 나에겐 여전히 재미가 일등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만 전과 달리 용기가 부족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욕심도 좀 부려서 용감한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이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고 다음 겨울까지도 이어질 수 있기를!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리하는 가을
2020. 10. 9. 01:07
나에게 가을은 여름의 흔적을 정리하는 계절이다. 잘 때 입었던 나시와 반바지는 깨끗이 빨아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 놓고 바닥에 깔아 놨던 대나무 자리는 신문지로 말아서 옷방 구석에 세워 둔다.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뜨거운 현미 녹차를, 가끔은 유자차를 타 마시고 극세사 담요를 두른 채 장판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 하나 더. 여름 내내 냉장고 야채 칸을 지켜 줬던 복숭아까지 다 먹으면 완전한 가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가을에는 더위와 관련된 것들을 하나씩 보내며 지내는데 올해는 여름의 흔적 외에 다른 것에도 손을 대보려 한다. 이른바 정리하는 가을이다.
정리의 대상은 다양하다. 화장대부터 옷장, 책장, 서랍, 추억 상자까지. 한마디로 내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뒤집는 것이다. 왜 이렇게 큰 결심을 하게 됐냐 묻는다면 그건 바로 화장품 덕분이다. 나는 얼굴에 무언가를 얹는 게 답답해서 원래부터 화장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20대 초반엔 갓 성인이 되어 해보고 싶었는지 이것저것 사서 바르고 그랬다. 지금은 맨 얼굴로 다니지만 그때 샀던 틴트나 블러셔, 각종 브러시 등은 언젠간 쓸 일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 버리지 않고 내버려 두다 어느새 4년이 흘러 그 위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버렸다.
기초 제품만 쓰는 사람이 뭘 이렇게 많이도 쌓아뒀는지. 이제는 화장대를 정리해야겠다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럴 수가. '언젠간 필요하겠지' 물건들이 방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초등학생 때 썼던 필통과 동전 지갑, 끝까지 풀어본 적 없는 수학의 정석, 쓰다 만 공책 등등 말하자면 끝도 없고 한숨만 나온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이상 그런 방에선 편히 쉴 수 없지. 그래서 싹 정리해버리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꺼번에는 도저히 못할 것 같아서 매일 조금씩 하는 중이지만 하루빨리 널널해진 내 방을 보고 싶다. 반드시 가을 안으로!
축 목글 10회 달성
2020. 9. 17. 23:57
민하와 시작한 목요일의 글쓰기가 어느덧 10회를 맞이했다. 그 말은 즉 두 달 동안 매주 한 편씩, 총 열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인데 거의 모든 일에 용두사미였던 나로선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는 게 그저 놀랍고 뿌듯하고 스스로가 대견하다 촤하하.
물론 이렇게 뿌듯한 기분은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만한 고통을 겪긴 했다. 어떤 날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수습이 안되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글을 이어나가기 어려웠고 지각이라도 하는 날엔 약속 시간을 못 지켰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다. 앞으로 목요일마다 이런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니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매주 ^^)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기록을 하는 이유는 돌아서서 봤을 때 나의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만큼 든든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듣던 노래, 사고 싶던 가방,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날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그간 어떤 일을 해 왔고 그래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증명해 준 덕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이 귀찮은 걸 한 주도 빠짐없이 했다니 대단해! 라고 자만하기도 하며 이보다 어려운 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또한 채웠다.
그리고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10회를 기념할 수 있게 된 건 역시 나를 엄격히 관리해 준 민하 덕분. 아마도 나 혼자 시작했다면 여느 때처럼 열정이 파사삭 식어 블로그를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채찍질 해줘서 고맙고요 앞으로도 쭉 부탁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각은 종종 했어도 결석은 없었던 우리에게 선물을 주며 마무리 해야겠다. 10주 동안 열심히 달렸으니 다음주는 휴무! 그럼 다다음주에 봐요. 안녕!
오늘의 멍청비용
2020. 9. 5. 21:43
오늘은 이티씨 운영팀 회의가 있던 날. 작업실로 가기 전에 맡겨놨던 인쇄물을 찾으러 상수동 팩토리에 갔다. 집에서 일찍 나와서 그런지 작업물을 찾고 나서도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나도 이제 지각쟁이에서 탈출했구나 ㅎㅎ 뿌듯했다. 날씨도 덜 덥고 하늘도 파랗고 기분도 좋고. 이 정도면 작업실까지 자전거 타고 갈 수 있겠는데? 바로 따릉이를 빌려서 한강을 따라 달렸다. 처음엔 여유롭게 하늘하늘 바람도 즐기고 주말 한강을 보면서 감동도 받았다.
그러다 점점 불안해졌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 느낌에 잠깐 멈춘 다음 핸드폰을 봤는데 약속한 회의 시간까지 15분밖에 안 남아있었다. 아직 반밖에 못왔는데 하. 이대로 가다간 두 시에 도착할 거 같아서 근처 대여소를 급하게 찾아 자전거를 반납하고 택시를 탔다 와하하. 인간아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 뭐하니 택시를 타는데.
7500원의 교통비로 얻은 소중한 깨달음
1. 약속 전에는 뜬금없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2. 카카오맵이 알려주는 자전거 예상 시간은 항상 2를 곱해서 계산한다.
가방을 살까 말까
2020. 8. 27. 21:16
요즘 가방이 너무 사고 싶다. 오늘도 엄마 생일 선물을 사러 29cm에 들어갔다가 가방 카테고리 10 페이지를 정독하고 왔다. 며칠 내내 아른거리던 가방을 장바구니에 넣고 엄마의 선물(잊지 않았다)과 함께 주문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참았다.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생각해도 너무 충동적이었고 둘째, 사실 지난주에 이미 가방을 하나 샀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장만한 친구는 바로 로우로우의 스트링 백팩. 바스락거리는 질감의 얇은 소재로 만들어져 가방 자체가 아주 가볍고 주머니는 여닫기 편해서 에어팟처럼 작은 물건을 찾을 때 버벅거릴 일이 없다. 이 친구의 장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실용성도 좋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모양 아닐까?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색 천 위에 달랑이는 흰색 도트 무늬 스트링, 그리고 그 스트링을 조였을 때 나오는 형태. 아, 옆구리쯤 조그맣게 달려있는 주황색 끈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디테일들이 예뻐서 처음 메고 나간 날엔 유리만 보이면 등을 비춰보고 실실 웃었다.
그렇다면 요번주 내 눈에 들어온 가방은 또 무엇이냐. 나노백이다. 15인치짜리 맥북을 포함해 짐이 많은 보따리장수가 나노백이라니. 너무 작아서 사고 싶을 리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또 매력이더라. 핸드폰과 카드지갑을 넣고 나면 꽉 차는 가방이지만 몸에 걸쳤을 때 산뜻해 보이는 것이 여행하기에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에는 필름 카메라를, 다른 한쪽에는 나노백을 멘 나를 상상하면 그냥 사버려..? 싶다. 내가 마음속으로 골라둔 아이는 이번에도 검은색이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니까 부담이 없다.
이렇게 진심이라니 평소의 나라면 에잇 하고 사 버렸을 테지만 지금 시점에선 신중해야한다. 곧 여름이 지나면 니트, 자켓, 슬랙스 등등 더울 때는 못 입었던 가을 옷에 눈독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를 위해 돈을 아껴 놓아야 한다. 그래도 그 가방 아직 장바구니에 있는데 역시 살까 말까 할 땐 사는 걸까? 아니면 잊어볼까?
나른한 늦여름 플레이리스트
2020. 8. 21. 05:23
여름, 하면 떠오르는 음악들이 있다. 똥 또로롱 하고 가벼운 소리로 시작한 다음 공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어오고 흥이 점점 차오르다가 후렴이 되면 팡! 터지는, 그런 시원한 음악들. 코로나 시국이니 만큼 집콕 중이지만 마음만은 이미 캐리비안베이에서 쏟아지는 해골물을 맞고 있다. 요즘같이 아지랑이가 이글거리고 공기가 후끈한 날씨엔 이런 음악을 들어줘야 더위를 버틸 힘이 난다.
그러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슬슬 부는 바람처럼 마음을 식혀 줄 노래를 찾게 된다. 그래도 여름이니까 너무 차갑거나 건조하지 않으면서 노을 지는 오후의 나른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걸로. 매우 주관적이긴 하지만 나름 까다로운 기준이라 이를 충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야 들을 맛이 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깐깐한 시험을 통과해 내 귀에 들어온 곡들은 따로 모아서 나만의 작은 앨범, 이름하야 나른한 늦여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놓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도 내가 요즘 꽂혀 있는 세 곡을 공유하려 한다. 주로 인적이 드물고 평화로운 전원 마을을 떠올리는 포크송들이다.
Whitney, Giving Up
작년 여름, 통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처음 들은 노래. 창 밖으로 보이는 산골 마을의 풍경과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남아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을 때 자주 찾아 듣는다. 시작은 소박하지만 곡의 후반으로 갈수록 브라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리가 쌓여 풍부해지는데 여기에 살짝씩 들리는 탬버린이 아주 귀엽다.
Cass McCombs, Bum Bum Bum
카스 맥콤스! 최근에 스포티파이의 알고리즘으로 알게 된 가수이다. 위에서 소개한 휘트니가 금빛 전원 마을을 떠올린다면 이 곡은 쓸쓸한 무채색에 더 가깝다. 아마도 곡 전반에 깔려 있는 묵직한 베이스와 기타 연주가 큰 몫을 하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바로 내 옆에서 자신의 일기를 읽어주는 것 같아 이 사람의 친구가 된 느낌이 든다.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Kings of Convenience, Gold in the air of summer
마지막은 내가 아주 애정하는 편리왕의 노래. 담백한 화음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곤조곤 부르는 가사에는 일상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많은데 그 목소리를 따라 상상을 하다 보면 평화로운 단편 소설 하나를 다 읽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 참 잘 지었다. 그리고 이 곡은 뒤에 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압권이다. 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낼 수 없을 테니 끝까지 들어보기를.
위의 노래들이 마음에 든다면 각 앨범을 다 들어보는 것도 좋다. 자극적인 음악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아 가을이 오기 전까지 풍족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듣고 싶은 음악이 없는 일상은 너무 버석하니 말이다.
쉬는 연습 중
2020. 8. 14. 22:29
쉴 때는 뭐해?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 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음…’ 하고 고민을 하다 ‘그냥 누워있어요’ 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린다. 진짜로 누워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건 또 아니기에 완전히 맞는 말이라고 할 순 없다.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하기는 커녕 좋아요만 눌러 놓고 미루기 일쑤이며, 게임엔 금방 싫증이 나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거나 배 터지게 먹는 걸로 응어리를 푸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나에겐 일이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어쩌구 저쩌구. 이쯤 되면 뭐 어쩌자는 건지. 이렇게 써 놓고 나니 내가 봐도 할 말이 없지만 나는 여태껏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는 대로, 무기력하면 무기력한 대로, 시간이 약이라 생각하며 지내왔다. 마치 오래달리기라도 하는 듯 숨이 부족하고 머리가 띵 해도 저절로 움직이고 있는 발을 멈추는 게 더 어색했다.
그러다 최근에 아주 긴 무기력을 겪었다. 스트레스를 풀지 않고 묻어둔 탓인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계속 달리다가는 정작 속도를 내야할 때 멈춰버리겠구나. 이젠 제대로 쉬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머리를 비우고 무기력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다.
가방 속에서 구겨져 있는 영수증을 버리거나 때가 탄 칫솔 걸이를 닦는 등 사소하지만 귀찮은 일들을 끝내서 성취감을 얻는가 하면, 매주 일요일 밤을 선데이 무비 나잇으로 정해 미뤘던 영화를 하나씩 클리어하기도 한다. 아, 왕초보 뜨개질 키트도 주문했다! (이게 제일 기대됨. 오늘 집에 가서 할 거다.) 문득 너무 부지런히 쉬고 있나? 싶지만 무기력했던 나를 점점 잊어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성공이다. 칭찬해!
오늘 한 일
2020. 8. 6. 22:10
오늘은 목요일. 목요일의 글쓰기 하는 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600자 이상의 긴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면 된다. 주제는 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관심 있는 것 또는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것으로 정한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관심이 가는 것도 없고 생각도 정리되지 않기에 이번 글에서만큼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단편적으로 늘어놓으려 한다.
1. 열시에 일어났다.
나는 보통 새벽 두 시에서 세시 쯤 잠들어서 오후 열두 시에 깬다. 보통 사람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려는 노력도 해 봤지만 다시 눕든 낮잠을 자든 결국에는 부족한 잠을 채우게 되길래 내 몸이 가장 편한 사이클에 맞춰서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잠귀가 어두우니 알람도 듣지 못할까봐 불안했는데 웬일로 첫 번째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떴다. 신기했다.
2. 소모임 회의를 하러 나갔다.
나는 같은 과 친구 두 명이랑 소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이 다루고 싶은 내용과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 작은 책을 만드는 소책자 모임으로,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의 친구들이 참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아카이빙 할 수 있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서 미루게 되었다. 나와 운영진 친구들은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짧은 워크샵을 기획하고자 오늘 만나서 긴급 회의를 했다. 재밌는 아이디어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기대된다!
3. 스프 카레를 먹었다.
회의를 하면서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당이 급격히 떨어져서 기력이 없었다. 마침 근처에 맛집 잘알 친구가 스크랩 해 두었던 스프 카레집이 있어 거기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 셋 다 야채+닭다리 카레를 주문했는데 단호박, 당근, 가지 등등 모든 야채가 완벽하게 구워져서 한 입 먹고 감동하고, 또 한 입 먹고 감동하기를 반복했다. 아 닭고기도 전혀 질기지 않고 야들야들해서 맛있었다. 나중에 또 가야지.
오늘의 일기 끝.
여름엔 복숭아 타령
2020. 7. 30. 23:58
여름은 정말 덥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그 땀에 젖어 옷은 축축해진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뽀송했는데. 세탁한 옷을 꺼내 입은 보람이 없다. 냉방병이 걸릴 만큼 추운 실내에 들어가 더위를 식혀도 한번 땀이 지나간 자리에 찝찝함은 그대로 남는다.
여름은 정말 습하다. 특히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습기가 아주 가득해서 공기 중에 꽉 차 있는 물방울들이 눈에 보일 것만 같다. 이런 날씨에 밖을 걸어 다니면 그 물방울들이 나를 따라와 팔이나 다리에 척 달라붙는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또 어떤가. 잠이 덜 깨 밍기적거리고 싶어도 벌써 살이 끈적거려서 하는 수 없이 이불 밖으로 나온다.
이 짧은 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여름을 싫어한다. 어릴 땐 겨울은 한국에서, 여름은 아이슬란드에서 보낼 수 있는 부자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봄, 가을, 겨울만 살고 싶은 그 마음은 여전하지만 올해는 여름이 오기를 아주 약간 기다렸다. 바로 복숭아 덕분이다. 작년에 갑자기 복숭아에 꽂혀서 하루에 두 개씩 여름 내내 먹었는데 철이 지나 먹을 수가 없게 되자 정말 그리웠다.
백도로 시작해서 천도를 잠깐 스치고 황도로 마무리. 이것이 나의 여름 복숭아 루틴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실천하고 있다. 옅은 단맛과 가벼운 향의 백도, 톡 쏘는 신맛의 천도, 시원하고 달달한 맛에 과즙이 넘치는 황도. 이 셋 중에서 황도 복숭아가 제일 좋지만 그래도 모든 복숭아가 소중하다. 스무디를 마신 것처럼 갈증이 풀어져 더위에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딱 좋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복숭아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싶은 건 일 년 중에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제는 여름이 지나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아직도 여름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싫어하는 마음을 덜었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컨셉진 입문기
2020. 7. 23. 23:59좋아하는 잡지가 있나요?
이때 ‘좋아하는 잡지’란 미용실 탁자 위에 있어서 또는 시간이 남아 서점을 서성거리다 우연히 읽은 잡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매달 나오는 때를 기억하고 찾아 읽는 것. 나는 그렇게 노력을 들여서라도 읽게 되는 잡지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아담한 크기에 색색깔로 나열된 컨셉진은 독립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았을 법한 라이프 스타일 잡지로, 매호마다 질문을 하나씩 던지는 게 특징이다.
'당신은 행복한 소비를 하고 있나요?' 이것이 내가 맨 처음 읽었던 호의 질문이다. 행복한 소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궁금했다. 항상 보기만 하고 언젠간 읽어봐야지 다짐만 했는데 그날 처음으로 컨셉진을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대부분을 읽었다.
재테크 전문가와의 인터뷰, 짠돌이가 주인공인 영화 추천, 현명한 소비를 생각하는 편집샵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까지. 실질적인 조언에 자극을 받다가도 재치 있는 글을 읽으면 슬쩍슬쩍 웃게 되고 그러다 보면 꽤 두껍다고 생각했던 한 권이 금세 끝났다.
예전에는 잡지를 읽고 나면 항상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날이 갈수록 위시리스트만 길어지고 흥미는 떨어져 한동안 잡지를 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컨셉진을 읽는 동안에는 질문의 답을 찾는 한 달을 만들 수 있다. 다음에는 무엇을 물어볼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기대가 된다. 나는 그래서 컨셉진이 좋다.
처음
2020. 7. 16. 19:13나의 첫 SNS 미투데이,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했던 과제, 어색한 친구에게 건넸던 첫 마디, 처음 데이트하던 날 입었던 옷과 모임 첫 시간에 했던 자기소개 등등. ‘처음’이라고 하면 지우고 싶은 기억투성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민망해서 으악 소리가 절로 나고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려치게 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말투는 이렇게 하고 표정은 저렇게 해야지. 그 옷 말고 다른 걸 입을 거야. 의미 없는 상상도 한다. 이렇게 후회로 가득 차 있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처음도 있다. 첫 필름 카메라를 사고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본 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떨떨하고 설렌다.
내가 필름 카메라를 사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오래전부터 필름 카메라 마니아였던 아빠에게 먼저 말을 했다. 아빠는 “너도 드디어 눈을 뜨고 말았구나”라고 말하면서 나의 결심을 아주 반가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를 보러 남대문에 가자고 했다. 아빠와 함께 가게를 다니며 어떤 게 좋은 물건인지, 카메라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필름 카메라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 가게에 들러 물건을 살피는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했지만 기계를 좋아하는 건 아빠를 닮아서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카메라를 고르고 나서 당연히 집으로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빠가 오늘 산 거 한번 쓰고 가자며 나를 근처에 있는 남산 자락으로 데리고 갔다.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나들이 같아서 마음이 들떴다.
사진은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백범광장에 올라가 찍었다. 필름 카메라는 처음이라 렌즈 뚜껑을 여는 데도 버벅거렸고 셔터도 엉겁결에 눌러서 막 찍은 사진이 나왔지만 다른 때와 달리 그 서투름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나의 첫 필름 사진은 시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그날 아빠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려 날 기분 좋게 한다.
여행 조각
2019. 9. 1. 23:11올해 여름, 통영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갈 때 다짐을 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조개껍질을 주워오는 것! 왜 그런 다짐을 하게 됐냐 묻는다면 구구절절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릴 때 바다에 가면 마음에 드는 조개와 소라의 껍질을 찾아 다니는 게 가장 큰 재미였다. 그렇게 찾아서 모은 껍질들은 집에 갖고 돌아오면 진열장 안에 보관했다. 그 조개껍데기들이 장 안에 놓인 지 10년. 이사할 때가 되니 짐이라고 느껴져서 버려 버렸다. 아무래도 시간이 흘러 무뎌졌는지 조개껍질을 봐도 예전처럼 예쁘고 신기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역시 그 소중함을 있을 땐 모르겠더니 없으니 알겠다. 어딘가 삭막한 내 방에 그 많던 조개 중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버린 것이 후회가 되어 이번 여행에서 꼭 조개껍질을 주워오자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바다를 갔더니 새로웠다. 마침 날씨도 좋아서 바다도, 물에 젖은 돌도, 부드러운 모래에 박혀있는 조개도 반짝거렸다. 색이나 모양이 오묘한 애들을 골라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 데리고 왔다. 지금은 내 방 책장 위에 오렌지색 병뚜껑과 함께 나란히 올려놓았다. 그림을 그리다, 작업을 하다, 청소를 하다 한 번씩 보면 흐뭇하게 웃을 수 있다. 기분이 좋아지는 껍질이다.
카페인 노마드
2019. 8. 23. 15:53일을 하면서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점심시간이다. 배를 든든히 채워주는 식사도 좋지만 나에겐 그 후에 마시는 커피가 더 소중하다. 오후 근무를 시작하기 전, 직원 식당 한쪽에 있는 커피숍으로 달려가 아이스 카페라떼를 주문한다. 부드러운 우유와 고소한 커피가 잘 어우러진 맛은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 근무지로 돌아가는 길에 시원한 라떼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이면 오전에 덜 깬 몸이 풀리고 남은 시간을 잘 버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나른한 오후에 잠깐의 커피 타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가 있다. 인디밴드 '9와 숫자들'의 보컬 ‘9’가 부른 ‹카페인 노마드›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힌트를 주듯이 이 노래는 춘곤증을 이기기 위해 커피를 찾아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눈을 감고 커피를 마시며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비록 나의 몸은 사무실에 앉아 있을지라도 3분의 시간 동안에는 세계의 유명한 커피 산지들을 여행할 수 있다.
케냐에서 시작된 이 여행은 다음 날 자메이카 푸른 언덕에서 여명을 맞이하며 끝난다. 힘을 빼 자연스러운 ‘9’의 목소리에 잔잔하면서도 산뜻한 어쿠스틱 기타가 어울려 오후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노래가 끝나고 눈을 뜨면 다시 현실이지만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음악의 후반부에서 ‘9’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잘 몰라. 그 맛이 그 맛 같고 그냥 그렇게 믿으려고 해 난. 네가 말해준 대로’. 고백하자면 나도 커피의 맛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그 시간만큼은 내가 무엇을 마시든 잠깐의 여유를 누린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카페인 노마드의 가사를 곱씹으며 내일은 무엇을 마실지 즐거운 고민을 한다.
세모난 밭
2019. 7. 13. 02:29내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다. 벽 한 면의 3분의 2 정도 차지하는, 꽤 크기가 큰 창문이다. 가끔씩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기에 이 창문의 크기가 만족스럽다. 사실 마음 같아선 벽을 꽉 채우면 좋겠지만 그럼 겨울에 너무 추울 것 같고 빛이 많이 들어와서 늦잠을 자지도 못할 것 같다. 창문을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면 높낮이가 다른 세 채의 빌라가 보이고 그 여백은 하늘과 움직이는 구름 덩어리들이 채우고 있다. 하늘을 가리는 빌라들 없이 파란색만 가득한 풍경을 바라긴 하지만 그랬다면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 방엔 그런 창문이 하나 있는데 의자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면 한 층 낮은 높이에 삼각형의 밭이 보인다. 빌라들을 짓고 남은 자투리땅인지, 귀퉁이의 느낌이 나는 이 세모난 밭은 겨울과 여름의 풍경이 아주 다르다. 겨울에 볼 수 있는 것은 푸석푸석한 황토색 흙과 가시만 남은 생선같이 비실한 나뭇가지들뿐이다. 땅이 얼어서 흙냄새도 맡을 수 없다. 그렇게 황량한 곳이 여름에는 초록색 공 놀이장이 된다. 무성해진 잎들이 서로 겹쳐져 다양한 톤의 초록색 점들을 만들고 바람이 불면 그 점들이 호들 호들 흔들린다. 해가 쨍쨍한 날에는 햇볕에 바싹 마른 빨래의 향을 맡을 수 있어 푸근하다.
쨍쨍한 향과 시원한 바람,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좋아서 창을 보통 활짝 열어놓는데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가끔 밭 주인 아저씨가 비료를 뿌려 냄새가 난다거나 식후 담배 타임을 가질 때가 있는데 이럴 때는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가 뭔가 덜그럭 덜그럭거린다 싶으면 저녁을 먹다가도 호다닥 방으로 달려가 창문을 꼭 닫아야 한다. 방에 가만히 있다가 냄새를 맡았다면 이미 늦은 거다.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횡단보도 흰색 선 안 밟기 같은 혼자만의 게임을 하는 것 같아서 재밌기도 하다. 이제 바람 대신 후끈한 열기만 들어오는 한여름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가을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